문제의식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스승의 문제의식이 무엇인지를 먼저 파악해야만 한다.
예수의 문제의식은 고착화된 율법 중심의 사회와 그로 인해 발생하는 신앙의 외면화, 그리고 그 결과로 나타나는 사람들의 위선적인 모습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에게 중요한 것은 율법이 아닌 믿음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신앙을 설교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신앙을 내면화 하는 것, 그리하여 위선적인 신앙의 모습을 타파하고 말과 생각과 행위가 일치하는 참된 신앙을 찾는 것이었다. 믿음과 사랑이라는 내적인 두 축은 이러한 문제의식에 대한 해답으로 나타난다.
사도 바울의 문제의식은 유대인들의 배타성이다. 이방인들에 대한 선교의 선봉으로서 바울은 예수를 통해 이방인들에게도 열려진 신앙을 전파하는데에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이방인들을 같은 신앙의 테두리 안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유대인들의 배타성이라는 점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따라서 하느님 앞에서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이나 결국 다를 것이 없다는 점을 설파하는 것이 바울의 가르침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 앞에서는 똑같이 죄인이며, 예수를 통해서 모든 사람이 그 죄를 용서받고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교리는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에 대한 바울의 해답인 것이다.
가르침보다 먼저 있는 것은 가르쳐야할 필요이다. 이 필요는 문제의식으로부터 나온다. 문제의식에 대한 고찰은 가르침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가르치기 위해서도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by Ondal | 2006/06/21 23:57 | 트랙백 | 덧글(0)
도덕 교육의 첫걸음
선에 대한 인식과 죄의식의 근원이 동정심으로부터 온다면

동정심에 의한 고통과 기쁨의 경험이 없는 도덕은 사실 무의미하다.
그저 남의 것을 빼앗는 것은 나쁜일이라고 혼이나면서 얻게 되는 외부로부터의 고통은
아이를 관습의 노예로 만들 뿐이다.

따라서 타인의 고통에 고통스럽고, 타인의 기쁨에 기뻐지는 동정심의 경험이야말로
우리가 도덕교육에서 삼아야할 첫번째 과제다.
by Ondal | 2006/06/12 00:35 | 트랙백 | 덧글(0)
죄의 근원
죄의 근원은 곧 선의 근원이다.
같은 근원에서 나오지만 선의 근원이 기쁨이라면 죄의 근원은 고통이다.
(도덕이나 법이 그러하지 말라해서 죄가 생기고, 그러하라 해서 선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관습으로부터의 교육이 없다면 죄의식의 시작은 나의 행동이 다른 사람을 슬프게 했을 때,
그 사람의 슬픔에 내 마음이 불편해지는 최초의 경험으로부터 발생할 것이다.

친구의 장난감을 빼앗은 아이가 친구의 우는 모습, 화내는 모습을 통해 느끼게 되는
마음의 불편함으로부터 아이는 그 장난감을 얻게 된 자신의 만족감과 대치되는
다른 감정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동정심에 의한 고통의 경험이 죄의식의 근원이자 동시에 죄 자체의 근원이기도 하다. 죄는 의식하지 못하는 한 죄가 아니기 때문이다. 죄는 원래부터 죄가 아니라 죄라고 느끼기 때문에 죄이다.

결국 죄의 근원은 선의 근원과 동일하다. 즉 욕망과 초월적 이성의 이중주로부터 가능하게 되는 타인에 대한 동정심으로부터 죄가 발생한다.

by Ondal | 2006/06/11 23:55 | 트랙백 | 덧글(0)
선의 근원
선의 근원은 욕망과 초월적 이성의 이중주이다.
나의 욕망을 통해 타인의 욕망을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선은 창출된다.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도 하지 말라고 하는 공자나
내가 원하는 것을 남에게도 해주라는 예수의 가르침은
결국 나의 욕망을 통해 남의 욕망을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나를 통해 남을 미루어 이해하는 것은 인간 이성의 고유한 초월적 능력이다.
이러한 욕망과 이성의 이중주를 통해 가능하게 되는 동정심은
불가에서 가르치는 자비의 근원이기도 하다.

by Ondal | 2006/06/11 23:24 | 트랙백 | 덧글(0)
앎, 믿음, 행위의 삼위 일체에 대하여.
앎과 믿음과 행위는 궁극적으로 하나이다. 
온전히 아는 사람은 곧 온전히 믿는 사람이고 온전히 믿고 아는 사람은 온전히 행한다. 어느 것 하나가 빠지더라도 앎, 믿음, 행위는 온전한 것이 아니게 된다. 이는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문제이다. 우리의 일상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바로 이 앎, 믿음, 행위의 삼위 일체에 의해 구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일상적인 모든 행위는 앎과 믿음을 근간으로 한다.  
우리는 사람이 굶으면 죽는다는 것을 안다. 밥을 먹지 않으면 죽는 다는 것을 믿는다. 완전한 앎은 완전한 믿음이다. 완전한 상태에서 믿음과 앎은 차이가 없다. 밥을 먹지 않으면 죽는 것을 알고 믿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로 우리는 밥을 먹는다. 밥을 먹는 행위에는 밥을 먹어야만 죽지 않는다는 앎과 믿음이 근본적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사실 작은 행위 하나 하나에는 이러한 앎과 믿음이 이미 내포되어있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앎과 믿음이기에 그 존재자체를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것 뿐이다. 엘레베이터를 타고 일층으로 내려갈 때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엘레베이터를 타지만, 사실 거기에는 엘레베이터가 나를 안전하게 일층으로 내려다 준다는 앎과 믿음이 이미 깃들어있다. 만일 엘레베이터가 언제든지 추락할 수 있다는, 즉 나를 일층으로 데려다주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든다면 그렇게 자연스럽게 엘레베이터에 몸을 맏길 수가 있겠는가? 버스를 타고 직장에 간다면 버스에 대한 믿음이 이미 있는 것이고, 두 다리를 내 딛는 것은 그 걸음이 나를 지탱하고 앞으로 옮겨준다는 믿음이 있는 것이다.
물론 완전한 믿음이 없이도 행위는 가능하다. 예측은 곧 불완전한 믿음이다. 맛있을 것 같다는 예상에 음식점을 찾고, 오를 것 같다는 예측으로 주식을 산다. 이렇게 불완전한 믿음 조차도 우리를 행동하게 하는데, 그렇다면 완전한 믿음은 어떠하겠는가. 주식이 오른다고 완전히 믿으면 당연히 주식을 살것이고, 음식이 오늘도 어김없이 맛있다는 완전한 믿음이 있다면 당연히 그 음식점을 갈 것이다. 완전한 믿음은 완전한 행위를 낳는다.
결국 우리가 행동하지 않는 다는 것은 믿지 않기 때문이다. 신을 믿으면서 신의 뜻을 따르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신의 뜻을 따르지 않는 것은 신을 완전히 믿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믿음은 이미 완전을 내포한다. 불완전한 믿음은 모순이다. 겨자씨만한 믿음은 곧 믿음이다. 믿음은 의심이 없음이다. 신을 완전히 믿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신을 의심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고 그것은 결국 신을 믿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믿음과 앎과 행위는 하나이다.
by Ondal | 2006/06/10 23:27 | 트랙백 | 덧글(0)
평등의 근원으로서의 죄
사도 바울에게 죄의 본질은 평등이다. 유대인들의 선민의식으로부터 신을 구원하여 모든 인류의 신으로 만들기 위해서 가장 필요했던 일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신 앞에서 평등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신 앞에서의 모든 인류의 평등을 이야기 하기 위해 사도 바울은이 택한 논리는 신 앞에서 모든 인간이 죄인이 되는 '죄인으로서의 평등'이었다. 모든 인간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신 앞에서 모두 죄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구원은 모든 죄진 자들을 위한 구원이다.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누구나 죄를 용서받고 구원에 이를 수 있다. 모든 인간은 죄를 지은 존재로서 신앞에서 평등하고 따라서 구원 앞에 평등하다. 죄의 본질은 평등이다.
by Ondal | 2006/06/10 01:53 | 트랙백 | 덧글(0)
소크라테스와 사도 바울
진리의 절대성을 설파한 소크라테스와 그리스도교의 보편성을 전파한 사도 바울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두사람은 모두 기존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부터 출발한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정치공동체에 도전했고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도전했다. 그리고 그 도전은 기존의 권위를 무너뜨리는 것으로부터 시작했다. 소크라테스는 모든 아테네인들을 무지한 사람을 만들었다. 모든 사람이 무지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진리를 향한 여정을 시작할 수 있었다. 사도 바울은 모든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었다. 유대인과 이방인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를 향한 여정을 시작할 수 있었다. 모든 사람의 무지와 모든 사람의 죄, 이 두가지 부정으로부터 모든 인류는 진리와 구원을 향한 여정에 동참할 수 있게 된다. 소크라테스와 사도 바울은 이러한 궁극적인 부정을 기존의 권위에 눈이 멀어 마음이 닫혀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여는 방법으로 사용했다는 점에서 거의 동일하다.  
by Ondal | 2006/06/09 23:53 | 트랙백 | 덧글(0)
계속 젊기
젊은이의 패기와 꿈은 자신과 자신의 삶이 특별하다는 믿음 위에 서있다.


그리고 젊은 시절의 끝은 주로 자신이 평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체험으로부터 온다.
사회라는 현실에 던져진 이후 자신의 특별함에 대해 회의를 느낄때
그로부터 오는 좌절감은 그 특별하던 젊은이를 평범한 일반인으로 만들어버리는
무서운 힘을 지니고 있다. "그땐 어렸었지" 라는 회고적인 체념의 말은 "난 내가
특별한 줄 알았어" 라는 말의 다른 모습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실 나의 평범함을 직시해야하는 것은 정말 쓰린 경험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걸려 넘어지지 말아야하는 함정은 평범과 특별함이라는 구분의
저변에 깔려 있는 타인 중심의 사고이다.


시인이 되고 싶은 꿈을 지닌 사람들 중에는 시적인 재능을 타고난 사람도
있고 분명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 그런데 시인이 되고 싶다는 꿈은 그저 시를 쓰면 이루어지는
꿈이다. 만일 시인이 되고 싶은 꿈이 '다른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시인'이 되고 싶은 꿈이라면
분명 얘기가 달라진다. 그러나 유명해지고 싶은 것과 시인이 되고 싶은 것은 분명 다른 꿈이다.


남보다 잘 할 수 없기 때문에 하고 싶은 것을 포기한다는 것은 사실 말이 안된다.
나의 삶의 기준이 남에게 있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즐기고 내게 의미가 있으면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


살아가는 과정의 하나 하나가 의미있을 때 비로소 삶은 전체적으로 하나의 의미를 지닌다.
무엇인가 이루어놓아야만 내 삶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결과론적인 사고방식은
현대의 경쟁사회가 만들어 놓은 함정이다..
특별해야한다는 강박관념은 경쟁을 우선시하는 사회의 숨어있는 음모다.
게다가 이 특별은 다른 사람들과의 비교에 의해서만 가능한 특별함이고
따라서 어쩔 수 없이 경쟁에서 성공한 소수들만이 이룰 수 있는 특별이다.


진정한 의미의 특별은 보편적이다. 사람들 개개인이 고유하다는 의미에서
모든 사람든 특별한 것이다. 내 꿈은 내게 의미가 있기 때문에 특별한 것이다.
왜 시인이 되고 싶은가? 시를 쓰는 것이 즐거워서인가 아니면 시를 통해 유명해지고
싶어서인가? 왜 정치를 하고 싶은가? 정치를 하는 것이 의미가 있기 때문인가 아니면
정치를 통해 권력, 돈, 명예를 얻고 싶기 때문인가?


젊은 시절의 꿈은 그 자체로 즐겁고 의미가 있는 것일 테다. 그렇다면 남보다 뛰어나지
못하다는 사실이, 평범하다는 사실이 그 꿈을 방해하는 어떠한 요소도 될수 없다.
방해물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 경쟁해야만 하는 사회, 그리고 거기에 걸려넘어지는
나 자신이다. 평범함? 평범이라는 단어는 허구다.
꿈을 도마에 올렸다면 평범과 특별함의 칼을 치우고 행복과 불행의 칼을 들어보자. 
그러면 언제까지나 나는 꿈을 이루어가는 즐거움을 만끽하는 젊은이가 될것이다.
by Ondal | 2006/06/09 07:27 | | 트랙백 | 덧글(1)
실체가 아닌 진리
진리는 실체가 아니라 흐름이며 한편으로는 공식일지 모르겠다.
변수에 상관없이 일정하게 나타나는 하나의 결과를 찾는 일보다는
변수들을 이끌어 서로다른 결과를 낳게하는 저변의 공식이야말로
우리가 찾고자하는 바로 그 진리가 아닐까 싶다. 도라는 글자가
뜻하는 바는 진리의 이러한 측면을 잘 함축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by Ondal | 2006/06/08 23:59 | 세상 | 트랙백 | 덧글(0)
진리의 자유
혼돈이 주는 자유보다 진리가 주는 부자유가 더 자유롭다.
자유의 본질은 선택이기 때문이다.
by Ondal | 2006/06/08 01:04 |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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