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모범으로서의 예수님

꼭 이해가 된다고 믿을 수 있는 것만도 아니고 믿을 수 있다고 이해가 되는 것만도 아니지만

바른 이해와 바른 믿음은 서로 통하는 면이 있다.

예수에 대한 마음에 와닿는 글을 규항넷에서 읽어 옮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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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영의 예수전

1." 인류의 거의 모든 보편적 가치들이 드러난 오늘날, 우리는 예수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세대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온갖 물신과 탐욕에 깊이 빠져있고 예수를 팔아 장사하는 교회상점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영적 지도자, 메시아, 급진적혁명가, 교회비판가, 여성주의자, 인권운동가, 생태주의자, 아동주의자, 빈민해방운동가... 예수의 삶은 이 모든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을 외면한 채 십자가에 못 박혀 3일 만에 부활한 신의 아들, 창백한 얼굴의 백인 남성만으로 생각하기엔 우리는 예수의 역동성을 온전히 담아낼 수 없습니다. '지금' ,'여기'의 삶에 예수를 비춰보지 않는 것은 그의 가르침을 배반하는 것입니다." 김규항 선생의 말이 너무 반가웠다. 나의 예수전 강의는 정말 오랜만에 '소통'을 나눌 수 있는 기회였다.

2.마음속에 든 관념들을 어설프게 밖으로 표현해 낼 줄 아는 나이가 되자, 이른바 지식인이란 사람들이 한 눈에 들어왔다. 말글이 주는 화려함에 한참동안 현혹되었다.
그들이 부려 쓰는 언어가 마냥 멋있어 보였다. 말과 글을 온전히 사용하는 사람이야말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의 모든 측면은 말과 글로 나타낼 수 있다고 믿었다. 도리가 없었다. 만약 그 때 누군가가 말글의 허망함을 가르쳐주었다고 해도 알아듣지도 못했을 거다. 특별한 경험 덕에 '언어'를 잃었으며 그 때 예수를 알 게 되었다. 당시 내가 지표로 삼았던 지식인들은 하나 둘 멀어져가고 이젠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만큼도 남지 않았다. 그것이 당연한 과정임을 조금씩 깨닫는 중이다. 그래서 말글에 자신감이 가득한 사람을 보면 겁이 난다.


3.유다를 어떻게 볼 것인가 - 나또한 세상 야욕이 많은 사람이라서 유다를 보는 관점은 나를 성찰하는 기회가 될 것 같다.

예수는 유다의 고발이 아니더라도 죽을 운명이었다. 율법, 예법과 같은 형식만을 강조하던 당대의 흐름에 공공연하게 분노하고, 당시 유대의 지배세력이었던 바리새인들을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예수의 언행은 허례허식에 빠진 그들의 미움을 사기에 충분했다. 늘 자신의 언행에 추호의 흔들림이 없는 예수는 자기가 죽음을 당할 것이라는 예감을 누구보다 먼저 하고 있었다. 그리고 예수는 그가 자신을 배반할 사람임을 알고 있었다. 유다는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되길 바라는, 열렬한 혁명운동가인 것 같다. 예수가 보인 사회적 단호함은 유다에게 정치적 의미로만 이해됐다. 성전을 무너뜨리겠다는 예수의 말도 유다에겐 해방전쟁이라는 뜻으로만 들렸으리라. 예수의 머리에 비싼 향유를 붓는 여인에게 그 돈이면 가난한 자들을 도울 수 있지 않겠냐고 비난하는 유다는 죽음 앞에 처한 예수의 고독을 읽지 못한다. 눈에 보이는 현상과 세계만을 전부로 생각하는 유다는 생각의 여백이 없는 운동가. 사회적 감성과 연민은 사라지고 논리와 이념만 남은 운동가, 이웃의 남루한 삶보다는 단지 자신의 사상에 충실한 운동가와 닮았다. 그는 예수 일행의 돈을 관리할 만큼 , 제자들 중에서도 똑똑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죽음을 담담하게 말하고, 종종 알 수 없는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하는 예수에게 유다는 실망했을 것이다. 똑똑한 그답게 실망은 결별이 아니라 제거로 이어진다.
중요한 건 예수는 이 모든 수순을 훤히 알고 있다는 점이다. 처음에 유다를 제자로 받았을 때부터. 그럼에도 예수는 절대로 먼저 유다를 내치지 않는다. 최후의 저녁식사까지 유다와 함께 한다. 왜? 자신의 죽음을 통해 유다의 생각을 깨우칠 수 있었으므로. 유다는 예수가 제사장의 군대에게 붙잡힌 것을 본 후에야 자기의 행동을 반성한다. 반성은 스스로를 거듭나게 하는 기회이다. 하지만 유다는 그 기회를 버리고 죽음을 택한다. 그는 스스로의 행동을 용서할 수 없을 만큼 자의식이 지나치게 강한 혁명가였던 것이다. 신념과 사상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그 속에 들어있어야 할 인본적 가치를 망각한 운동가들을 보는 듯하다.
이 점에서 그는 베드로와 비교된다. 예수가 미리 예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무려 3번이나 부인한 베드로 역시 큰 잘못을 저질렀다. 하지만 그는 이것을 결국 극복해낸다.(베드로는 적어도 예수의 죽음이 주는 가르침을 배반하지 않은 셈이다.) 스스로의 오류를 인정하고 이것을 넘어선 베드로와 스스로를 용납하지 못하고 자살을 선택한 유다는 극명히 대비된다. 만일 유다가 자살을 하지 않고 치열한 반성을 거쳤다면 예수의 가르침을 누구보다 아름답게 전파할 수 있지 않았을까.
현실을 바꾸려는 사람은 늘 철저한 자기반성이 필요하고 또 자신의 오류를 극복할 줄 아는 용기가 필요하다. 뒤집어 말하면, 예수는 이 가치를 몸소 실천한 사람이다. 그는 인류가 오늘날에도 고민하는 문제들, 대립하는 가치의 충돌을 2000여 년 전에 조화롭게 녹여낸 사람이다. 예수가 우리에게 늘 살아있는 사람인 이유가 3일 만에 부활한 이유 때문이라고만 한다면 우리는 예수를 온전히 이해한 것이 아니다. 성서에서 흔히 보이는 , 일견 모순되는 듯한 예수의 발언은 그가 일관성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오해하기 쉽게 만든다. 그러나 찬찬히 들여다보면 모순되는 듯한 가치가 예수의 행동 속에 조화롭게 스며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마땅히 분노해야 할 일에 대해 분노하지 않고 마냥 관용만을 베푸는 사람이 있다. 또, 분노하되 끝까지 용서할 줄 모르는 사람도 있다. 예수는 분노하되 결국 용서하는 방식으로 해결했다. 이웃의 삶을 구체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구조적으로만 접근하는 사람이 있다. 또, 동정과 연민으로만 접근하는 사람도 있다. 예수는 늘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하며 당대의 지배계급과 체제를 맹렬히 비난했다. 기준 없는 개방성으로 자신의 정체성마저 상실한 사람이 있다. 또 정체성의 유지에만 치우쳐 개방성을 갖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예수는 개방적 태도를 갖지만 자신의 노선을 분명히 보여준다. 사회적 활동에만 치우쳐 내면의 성찰에 둔감한 사람이 있다. 또, 내면의 자아를 가꾸는 일에만 매몰되어서 사회적 자아를 상실한 사람도 있다. 공적 활동을 하는 와중에서 틈만 나면 홀로 떨어져 기도하는 예수는 둘의 조화를 보여준다.

4. 예수의 균형성은 그가 처한 현실과 동떨어져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현실의 남루함 한복판에서 보이는 것이기 때문에 더 큰 의미가 있다. 불과 몇 분후면 자신의 '이적'으로 병든 자를 회복시킬 것이면서 예수는 그들의 고통을 '애가 끓도록' 같이 슬퍼했다. ‘이적’은 일방적 시혜가 아니라 ‘소통’이 된다. 병자, 소수자와 아픔을 함께하는 연민은 위선 거짓권위에 대해 분노하는 마음과 한 쌍을 이룬다. 가난하고 소외받고 병든 자에겐 편파적일 정도로 그들의 편을 드는 동시에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며 유연성 있는 태도도 보인다.
그렇다면 예수는 늘 신념에 가득찬 확고한 사내였는가. 아니다. 예수는 가난하고 병든 이들과 함께 하며 세리와 잔치를 벌이고 '먹고 마시길 즐긴 자'였다. 사람들이 도달하기 힘든 권위와 도덕성을 공공연히 드러내며 금식 하는 세례요한과 예수는 대조적이다. 유다가 ‘여기’만을 집착했고 요한이 '저곳‘만을 바라봤다면 예수는 둘 사이의 균형을 유지했다.

5.참된 신념은 이성과 논리의 영역이 아닌 것 같다. 거짓 신념이야말로 오히려 논리가 매끄럽다. 진짜 신념은 철저히 감성적이다. 내 이웃이 소외당하고 아파하며 사는 꼴을 가만히 지켜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대개 그 이유를 설명해내지 못한다. 그러나 제 활동을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결국 세상을 조금씩 바꾸어 나간다. 한 사람의 소양이나 양식은 그가 가진 지식의 양과 아무 상관이 없다. 예수는 논리적으로 설득하지 않았다. 그러나 누구보다 깊게 약자들과 '소통'하고 있었다. 그는 결코 어려운 말을 쓰지 않았고 그의 비유는 어린아이도 이해할 만큼 쉽고 적절했다. 제자들이 예수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건 머리가 나빠서가 아니라 그들의 욕망으로 예수의 말을 이해하려 했기 때문이다. 예수의 죽음 이후에야 제자들은 그것을 깨닫는다. 깨우침은 늘 한 발 늦다.

6.언젠가 산상수훈을 언급하면서, 혁명이 올것이라는 해석을 곁들이는 김규항 선생의 호흡이 매우 가팔랐다. 목소리가 떨렸고, 팔을 책상 위로 올렸다 내렸다하며 몸을 계속 움직였다. 눈은 한참 전에 촉촉해져 있었다. 중년의 남자가, 자기 보다 한참 나이어린 사람들이 많은 강의실 안에서 그런 모습을 보였다. 나는 무참했다. 그의 말대로 청년의 의미는 육체적 나이와 무관한 것이었다.
누구나 청년 시절을 거치지만 끝까지 청년으로 남는 사람은 거의 없다. 어제의 청년이 별안간 오늘의 노인으로 변하는 모습은 아주 흔하다. 누가 끝까지 청년으로 남을 것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다만 '소유에 대한 저항'이 청년을 늘 긴장하게 만드는 원동력임을 이 강의를 통해 배웠다.

by Ondal | 2006/06/05 22:11 |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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